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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했던 작업을, 엄마 건축가의 시각으로 | 전보림

소다미술관에서 처음 전시의뢰를 위해 우리 사무실을 찾아 왔을 때, 나는 전시의 정확한 내용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놀세권이라는 말부터 난생처음 들어본데다 놀이터를 만들 때 사용한다는 브릭은 진짜 벽돌인줄로 착각하고 질문을 했을 정도였다. 지금이야 놀세권이 역세권이란 말처럼 놀이터가 가까워 아이들이 뛰어 놀기 좋은 동네를 일컫는 말이라는 것도, 브릭은 회사의 이름이 더 익숙한 장난감의 개별 블럭을 뜻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정말이지 전혀 감이 없었다. 왜 이렇게 낯선 말들을 사용해서 전시를 하는 것일까 슬쩍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엄마 건축가를 찾다가 나에게 연락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자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그런 의구심은 묻어 두기로 했다. 무엇보다 전시개념을 설명하는 큐레이터와 미술관 관장이란 사람들이 모두 선하면서도 자기 일에 대해 열정과 신념이 있는 사람들 같아보여서 성큼 호감이 갔다. 해서 작은 장난감 블록으로 놀이터를 만들어 전시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일단 그런 생각은 접고 전시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전시는 5개의 건축가 팀이 각각 2개씩 모두 10개의 놀이터를 만들도록 기획되었다. 모래놀이터, 미로놀이터, 슬라이드놀이터, 매달리기놀이터 등 순수한 놀이터용도의 공간뿐만 아니라 공원과 공공건축물인 산지형공원, 선형공원, 근린공원, 도서관, 학교운동장, 실내체육관, 미술관까지 놀이터의 개념으로 포함시켜 디자인하는 것이다. 그 중 우리 팀에 주어진 놀이터 두 가지를 두고 엄마건축가인 나는 산지형공원을, 아빠건축가인 남편은 체육관놀이터를 만들기로 역할을 나눴다. 내가 산지형공원을 선택한 이유는, 우리나라 도시의 지형적 특성을 살린 놀이터 형식을 제안하고 싶어서였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풍수지리상 배산임수의 지형을 선호하다 보니 많은 도시가 산을 끼고 발달해 있다. 특히 서울과 근방의 도시 또한 대부분 산을 끼고 있는데 워낙 땅에 대한 수요가 많아서인지 공원과 놀이터를 위해 남겨진 공간은 집을 짓기 어려운 가파른 경사지인 경우가 많다. 그런 경사지 근린공원을 어린이 놀이터로 활용할 방법을 고민해서 제안해 보는 것은 실용적인 의미가 있으리란 심산이었다.

미술관에서 보내준 브릭이 도착하자 사무실이 아닌 집에 펼쳐 놓았다. 건축가로서 디자인해야 하는 소위 ‘일’이었지만 재료의 특성상 집에 있는 시간동안 아이들이랑 함께 놀이하듯이 만들기 위해서였다. 실제로도 내가 무언가를 만들고 있으면 아이들이 다가와 옆에서 자기네들만의 장난감을 만들기도 하고 내가 만드는 모형에 브릭을 붙이기도 했다. 아이들과 함께 일을 하다니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는 열다섯 살, 열두 살, 다섯 살 세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들 모두 각자 다른 방식으로 작품제작에 참여했다. 첫째는 내가 만든 산지형공원에 3D프린터로 나무모형을 만들어주었다. 그냥 나무모양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둥치부분을 브릭과 연결할 수 있게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모델링해서 만들었다. 단순해 보이는 결과물이지만 3D 프린터로 출력하는 동안 나무가 쓰러지지 않도록 나중에 떼어 낼 지지대까지 모델링을 하는 등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서 만들어 낸 것이다. 둘째는 남편이 만든 실내체육관의 기본이 되는 공간을 자기가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인 마인크래프트의 가상공간에서 먼저 구상했다. 그 디자인을 바탕으로 실내체육관 놀이터가 만들어졌다. 아이도 남편도 그렇게 함께 만든 과정을 만족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공부와 놀이와 일이 각각의 담장을 두르지 않고 그 경계가 허물어진 것은 유쾌한 경험이었다. 아마 아이도 처음으로 그런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가장 많은 시간동안 참여한 셋째는 내가 만든 산지형공원에 놀이기구를 함께 만들기도 하고 작은 동물 모형을 만들어 공원에 올려놓기도 했다. 아이가 작은 동물을 만들자 나는 비슷한 모양의 큰 동물을 만들어서 엄마와 아기라고 설명해 주고 둘을 함께 두었다. 한참 엄마를 좋아하는 나이인 막내는 아기동물이 엄마동물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매우 흐뭇해한 것은 물론이다.

산지형공원을 만드는 작업에서는 사실 놀이기구보다 지형을 만드는 과정이 가장 어려웠다. 브릭 하나의 높이는 스케일로 계산해보면 약 60센티에 달하는 높이인데 그 스케일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불규칙한 경사와 구불구불한 형태를 가진 지형을 만드느라 대부분의 작업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만들고 부수고 다시 만들기를 반복해서 겨우 만족스러운 경사지형을 만들 수 있었다. 대신 일단 지형을 만들고 나니 놀이기구를 만드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일단 내가 설정한 놀이터의 개념이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자연과 어우러진 숲속 놀이터를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놀이기구를 만들 때는 최소한의 부재를 사용해서 다양한 형식을 만들려고 했고 그렇게 덜어내는 과정이 오히려 쉽지 않았다. 이번에도 첫째가 3D프린터로 미끄럼틀 모형을 만들어서 다양한 놀이기구를 만들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리고 놀이기구만 넣기보다는 막내가 만든 동물모형을 숲속에 넣어서 사람과 동물이 어울려 살아가는 자연을 표현하고자 했다. 산지형 공원 놀이터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자연에 대한 존중이다. 사실 아이들은 땅이 살짝 기울어지기만 해도 그 자체를 놀이터 삼아 놀 수 있는 풍성한 존재들이다. 언덕은 그런 면에서 아이들의 놀이 공간으로서의 무궁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거기에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나무 사이로 오르락내리락하며 놀 수 있는 놀이터를 제안한 것이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시작했던 전시였지만, 돌아보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맨날 일에만 치여 사는 건축가 엄마 아빠를 둔 우리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무언가를 만들고 그 결과물을 전시했던 경험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놀세권’이라는 말을 만들고 이를 계기로 우리 주변에 놀이터가 얼마나 자주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지금 우리나라 도시에 어린이를 위한 놀이공간이 얼마나 결핍되어 있는지, 그동안 우리가 어린이의 놀이 환경에 대해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건축가들이 어린이 놀이터의 형식적 가능성을 실험해 보고 놀이공간의 개념과 범위를 확장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를 전시를 통해 널리 공유하는 일은 더 나은 놀이 환경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비록 브릭이라는 소재의 특성상 표현할 수 있는 디테일의 수준이 낮은 점은 아쉬웠지만, 아이들의 장난감을 재료삼아 놀이터를 만드는 아이디어는 전시를 보는 사람들의 흥미를 이끌어내는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는,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존재가 이름을 불러 주었더니 비로소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는 표현이 있다. 그처럼 이번 연구와 전시를 통해 우리가 ‘놀세권’이라는 이름을 만들어 불러줌으로써 그전엔 그저 어딘가에 당연한 듯 무심히 존재했던 놀이터들을 어린이 놀이 환경이라는 보다 통합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다 같이 놀자 동네 세바퀴>(경기도어린이박물관 | 2020)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