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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숲에서 산책의 즐거움을 누리다

적당히 시끄럽게, 상당히 재미있게

어슬렁어슬렁, 사부작사부작, 두리번두리번. 한가로운 기분으로 이리저리 거닐 때 쓰는 표현들이다. 바쁜 일상에선 좀처럼 쓰기 어려운 그 말들이 그곳에선 공기처럼 자연스럽다. 가볍게 산책하며 즐겁게 책을 읽는 공간. 울산 북구에 자리한 매곡도서관이 그곳이다. 사람들의 느린 걸음을 타고, 밝은 마음과 환한 웃음이 수시로 오고간다. 가장 쉽게 가장 빨리 닿을 수 있는 ‘여행지’가 도서관임을 문득 깨닫게 된다.

“공공건축물은 사람들이 그 공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볼 수 있어 좋아요. 2017년 준공 이후 그곳에 몇 번 가봤어요. 재미있는 공간을 많이 만들고 싶었는데, 도서관 측에서 공간 뒤쪽 어두운 곳에 텐트 세 개를 놓으셨더라고요. 어떤 아이들은 소파에 누워서 만화책을 보고, 어떤 아이들은 텐트 안에서 놀고. 우리가 바라던 대로 쓰이고 있어 참 행복했어요.”

매곡도서관은 부부가 건축사사무소를 연 이후 처음으로 맡게 된 공공건축물이다. 부부는 2019 젊은 건축가상을 수상했다. 가슴 뛰는 첫 작품에 두 사람은 평소 느낀 불만과 소망을 차곡차곡 반영했다. 세 아이와 자주 도서관에 가는 그들은 공간과 공간이 엄격하게 분리된 도서관 구조가 얼마나 불편한지 경험으로 이미 알았다. 책을 읽기 위해 가족이 흩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일반열람실과 어린이열람실을 하나로 연결해, 가족이 함께 책을 읽을 수 있게 한 이색공간이 그렇게 탄생했다.

“도서관이 독서실처럼 이용되는 게 싫더라고요. 도서관은 시험공부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잖아요. 숨소리도 내지 않고 공부에 매달리는 장소가 아닌, 더불어 즐겁게 책을 읽는 공간이 되길 바랐어요. 적당히 시끄럽고 상당히 재미있는 그런 도서관이요.”

로비가 작고 초라한 대신 열람실이 높고 화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천창을 달아 내부로 부드러운 햇빛이 들어오게 했고, 빠듯한 예산에도 어린이열람실만큼은 원목마루를 고집했다. 책을 읽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몸소 깨닫게 하는 곳. 공공건축물로서의 도서관은 그런 곳이라야 한다고 부부는 생각한다. 단점을 장점으로 바꾼 것도 매곡도서관의 특징이다. 열람실 외에도 이곳의 모든 공간은 하나로 이어져있다. 땅이 가진 경사를 내부로 끌어들여, 서로 다른 높이의 열람실 서가를 완만한 경사로로 연결했기 때문이다. 공원이 아닌 도서관에서, 산 책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것은 그 덕분이다.

“경사로로 이어져있기 때문에 휠체어를 이용하시는 분들도 같은 경로로 공간을 이용할 수 있어요. 유럽에서는 보행약자를 위해 별도의 장치를 마련한 건축물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똑같이 이용할 수 있는 건축물이 차별을 없애는 더 좋은 디자인으로 인정받아요. 한국의 공공 건축물이 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매곡도서관이 작게나마 기여했으면 해요.”

열린 공간에서 ‘서로’ 따뜻이 만날 수 있도록 하되, 구석진 곳에서 ‘홀로’ 자기만의 즐길 수 있도록 설계한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삶에서 건져 올린 부부의 꿈들이 공간을 별처럼 비추고 있다.

인생을 바꿔준 곳, 도서관

두 사람의 첫 전공은 건축학이 아니다. 보림 씨는 조소를, 승환 씨는 조경학을 먼저 공부했다. ‘전과’로 만난 그들은 대학원 2학년 때 부부가 됐다. 졸업 후 소규모 설계사무소 생활을 각자 했고, 2004년 건축사 시험에 나란히 합격해 부부건축가가 됐다.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힘들고도 행복한’ 육아와 건축을 배턴을 이어가며 해나갔다. 그러다 덜컥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다. 두 아이와 함께였다. 경제적인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개인이 ‘공공’의 보호막을 입고 서로에게 관용을 베푸는 그 사회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며 지냈다. 그곳에서 자리를 잡을 수도 있었으나, ‘우리 일’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귀국 행을 택했다. 때마침 늦둥이가 생겼다.

“2014년 11월 우리만의 사무소(아이디알 건축사사무소)를 열었어요. 말이 건축사사무소지, 소장 두 명이 대표인 동시에 직원인 매우 초라한 개소였죠. 개점휴업 상태였던 우리 사무소는 몇 달 후 도전한 설계공모전에서 덜컥 당선이 되었어요. 그 프로젝트가 바로 매곡도서관이예요. 사무실의 첫 프로젝트가 공공도서관이었다는 걸 행운이라 생각해요. 첫사랑이라 더 애틋하고, 먼 데 있어 더 그리워요.”

이후 서울 언북중학교와 압구정초등학교의 다목적강당을 잇달아 설계하게 됐다. 그곳 학생들이나 학부모들로부터 ‘강당이 너무 좋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을 때, 그 때마다 보람이 샘물처럼 솟는다. 세 개의 공공건축물을 연이어 준공하면서, 서울시 공공건축가와 행복도시 공공건축가로도 활약했다. 부부건축가에서 부부공공건축가로 이름을 알려나갔다. 빠듯한 예산 안에서 수많은 조율을 해나가야 하지만, 두 사람에게 공공건축물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좋은 설계로 지어진 공공건축물이 모두의 삶에 어떤 행복 을 줄 수 있는지, ‘함께’의 힘으로 하나씩 보여주고 싶다.

“유럽의 공공건축물은 그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건축물이에요. 그렇게 되기 위해선 건축가들의 설계의도와 생계유지가 보장되어야 해요. 설계공모제도나 관련 법률을 합리적으로 바꾸는 데 힘을 보태서, 한국의 건축가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하면서 수준 높은 공공건축을 설계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건축사 자격증을 획득한 지 10년 만에 사무소를 열었으니, 보통의 건축가들보다 10년 정도 늦게 출발한 셈이다. 하지만 그 ‘늦음’을 후회한 적이 없다. 그 때마다 충분히 행복했다는 보림씨의 말에 승환 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은 새 책 <부부 건축가 생존기, 그래도 건축>을 펴내며 책의 위대함을 온몸으로 알게 됐다. 이미 썼던 글을 고치고 또 고치면서, 그 글이 감수자와 편집자와 디자이너의 도움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걸 보면서, 책을 내는 일이 건축물을 짓는 일만큼 힘들다는 걸 깨닫게 됐다. 그렇게 태어난 책들이 도서관에 모여 있다. 도서관을 향한 부부의 사랑이 태산처럼 커져간다.


사람과 땅 2020년 9월호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