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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공공건축 시스템, 무엇이 목표인가 | 전보림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나빴던 것인지, 나는 실무수련을 할 동안은 단 한 번도 공공건축 설계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일 년에 거의 천 건에 가까운 공공건축이 설계공모전을 통해 설계자를 찾지만, 내가 다닌 설계사무실은 실력이 있기로 제법 이름이 난 건축가가 이끄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모전에 도전하는 일은 별로 없었고 당선되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출산과 육아와 유학을 오가며 느릿느릿 살다가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개소를 하고나서 무심코 도전한 현상설계에서 뒤통수 맞듯이 당선되어서야 공공건축 설계를 하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모든 것이 새롭고 충격적인 신세계였다. 민간이나 공공이나 건축물을 설계하는 일이 뭐 그리 다르랴 싶었는데, 막상 공공건축은 그 업무의 무게 중심이나 절차, 범위가 민간건축과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계약서 없는 계약

가장 처음 맞닥뜨렸던 차이점은 계약과정이었다. 나로서는 믿기지 않았던 사실은, 공공건축 설계용역에는 제대로 된 계약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터넷 시대를 선도하는 나라답게 계약은 전자계약으로 하면서 그 과정에서 나오는 용역계약체결통보서를 계약서라고 부르는데, 거기에는 달랑 계약주체와 용역명, 기간, 금액만 적혀 있을 뿐이다. 자세한 내용은 계약 시 첨부한 문서인 '지방자치단체 입찰 및 계약 집행기준'에 있다고 하는데, 일반적인 용역을 기준으로 작성한 내용이라 건축설계의 특수성을 반영한 내용은 전혀 없다. 건축설계라는 일이 워낙 그 일이 범위가 넓고 절차와 업무량이 많다보니 업무수행 도중에 생기는 변수에 대응할 수 있는 기본적인 계약서 내용은 그야말로 필수다. 손바닥만 한 개인주택을 설계할 때도 계약서를 쓰고 일을 하는데, 공모전으로 설계자를 뽑을 정도로 규모가 있는 공공건축물을 설계하는데 일반사항이 적힌 계약서가 없다니 이게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 사실 우리나라에는 건축설계업무에 사용하라고 국토교통부에서 만들어 고시한 건축물의 설계표준계약서라는 것이 있다. 업무 수행에 필요한 상호간의 권리와 의무 등을 정한 것으로, 가장 자주 문제가 되는 대가의 조정, 계약의 양도 및 변경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국가에서 사용을 권장하며 만들어 놓은 계약서를, 정작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왜 그러겠는가.

나는 그 이유가 공동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가가 일을 시킨다는 미명하에 계약을 최대한 발주처에 유리하게 만들려는 구조적인 갑질에 있다고 생각한다. 계약의 내용이 명확하고 상세해질수록 갑과 을의 불공정한 관계를 대놓고 만들기는 힘들어진다. 그렇게 되면 도중에 빈번하게 일어나는 용역 내용의 변경과 그 대가지불에 대해서 발주처에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가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과업지시서와 같은, 발주처의 요구사항만 일방적으로 적어 놓은 문서를 계약 시 첨부할 뿐 일반사항이 있는 정식 계약서는 작성하지 않는다. 설계변경의 기준과 대가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조차 없는 계약 덕분에 그동안 공공건축을 설계했던 건축가들의 무용담을 들어보면 실로 드라마틱하기 그지없다. 발주처의 요구나 심의에 의해 설계를 몇 번이나 뒤집고 바꾸고 다시하고서도 설계 변경 비용을 한 푼도 받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이건 사실 너무 흔한 이야기라 이제는 논란조차 되지 못한다. 분명 건축설계를 하는 사람도 국민의 한 사람인데, 용역계약을 하는 동안 건축가는 착취해도 되는 노비계급으로 전략하고 마는 것인가?

설계할 시간 없는 설계기간

제대로 된 계약서가 없는 것도 문제지만, 제대로 된 설계를 할 수 없는 설계기간 또한 문제다. 내가 처음 설계했던 공공건축인 구립도서관의 규모는 700평이었는데, 설계기간은 달랑 4개월이었다. 현상설계를 통해 당선된 안을 가지고 계획설계, 중간설계, 실시설계 이렇게 세 단계를 거치며 도면을 그리고 내역을 만들어 예산에 딱 맞추어야 비로소 용역이 끝이 난다. 그러나 아무리 당선된 계획안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라고 해도, 700평이나 되는 규모의 공공건축물을 실시설계까지 하는 시간이 고작 4개월이라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좀 더 따져보면, 그나마 그 4개월 중 '설계'라는 일에 쓸 수 있는 시간은 고작 2개월 반 남짓에 불과하다. 나머지 시간은 내역작업과 금액조정이라는, 디자인과는 전혀 상관없는 고난스러운 업무에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면은 용역기간을 적어도 6주가량 남겨두고 다 완성해야만 한다. 6주를 제외한 나머지 2개월 반의 시간이나마 온전히 다 설계에 쓸 수 있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중간보고와 최종보고도 해야 하고 중간내역작업도 해야 한다. 구조, 토목, 기계, 전기, 소방 등 협력업체와 업무조율도 해야 하는데다 대관업무와 각종 인증과 심의 업무도 병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다 해내야 하는 4개월 용역기간의 화룡정점은 바로, 그 기간이 사실은 공휴일 포함이란 점이다. 즉 우리처럼 8월 말에 계약을 하게 되면 추석과 연말연시를 포함한 4개월의 기간 동안 일을 다 해야 한다는 뜻이고, 그 중 순수 업무일은 83일, 즉 80일 남짓한 기간이란 뜻이다. 과연 이 기간이, 수준 높은 건축설계를 하면서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건축설계라는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건축이 건축 혼자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분야와의 협력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 협력이라는 일이 준비, 땅! 하고 여러 분야가 출발선에서 동시에 시작해서 함께 끝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일단 건축에서 기본적인 계획도면을 완성해야 각 분야에서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 각 분야의 설계가 진행되면 일부 분야의 설계를 조정해야 할 일이 생긴다. 구조가 설비를 제약하기도 하고 거꾸로 설비가 구조를 바꾸기도 한다. 그렇게 설계된 내용을 서로 수정해 가면서 교차 확인해서 상충하는 부분은 없는지, 따라서 다시 수정해야할 내용은 없는지, 실수는 없는지 확인하고 보완해야 할 내용이 있으면 다시 각 분야로 보내서 수정한 내용을 다시 받아야 한다. 즉 여러 분야의 조율업무란 끊임없는 핑퐁 게임을 통해 진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와중에 발주처의 변경 요구 사항이라도 들어온다면? 그건 주어진 두 달이나마 온전히 건축설계에 쓸 수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협력업체들도 모두 각자 사무실의 사정이란 것이 있다. 건축설계에 비해 용역범위나 비용이 적은 대신 여러 개의 프로젝트를 해야만 사업을 운용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 말은, 우리가 도면을 던져주기만을 턱 받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받자마자 다른 일 다 제쳐두고 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뜻이다.

그러므로 지금 공공건축을 위해 주어진 설계기간은 그야말로 야박하기 짝이 없다. 딱 기본도면과 허가에 필요한 계획도와 마감도, 그리고 최소한의 상세도면만 그려서 타 분야와 사정하고 싸우고 어르고 달래고 하면서 정신없는 핑퐁게임을 해야 겨우 맞출 수 있는 그런 시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재료나 디테일은 고사하고 조금이라도 특별한 디자인을 하려고 디테일을 그리는 건 어지간한 성격과 열정을 가지지 않고서는 덤비기 힘든 일이다. 한마디로 현재 공공건축설계기간은 허가방 수준의 도면에서 멈추지 않고서는 도저히 맞출 수 없는 기간이다. 웬만한 작은 규모는 4개월, 만 평이 넘어야 6개월, 자그마치 4만 평이 넘는 세종시청사의 설계기간은 믿을 수 없게도 10개월이다.

건축가를 믿지 않는 제도

그뿐인가, 공공건축의 형식적인 서류작업은 그야말로 사람의 진을 빼 놓는다. 가장 힘든 일은 예상외로 도면 그리는 일이 아니라 지정 재료와 제품의 견적서를 받는 일이다. 물가정보지에 나와 있는 흔해 빠진 재료를 사용하지 않는 한은 내역에 업체 견적서를 첨부해야만 한다. 그러다보니 우리 사무실은 프로젝트마다 30여 개의 항목에 대해서 견적서를 받아서 제출했다. 또 그 견적이 가장 저렴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비교견적서까지 2개씩 더 내야 하니 견적서는 거의 90여 장에 이른다. 90장이든 190장이든 설계사무실에서 다 만들 수 있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업체에 일일이 전화해서 우리 설계에 필요한 사양과 물량, 건물명, 이메일 주소를 알려 주고 부탁해서 받아야 하는 것이라 그 업무량이 징글징글하게 많다. 견적서를 만들어 준 업체가 실제 시공에 참여할 가능성이라도 높으면 그나마 견적서를 부탁하는 입장이 덜 미안할 터인데,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도 못하다. 그저 관공사 내역에 들어간다는 이유로 제출해야하는 가격 증빙서일 뿐이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형식을 위한 형식을 갖추느라 설계자가 귀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소진해야 하는 걸까.

지금 우리나라의 공공건축 설계시스템에서는 설계자가 재료와 제품의 구체적인 사양과 제조사를 지정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설계자와 특정 업체 간의 결탁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디자인 의도에 부합하는 특정한 제품을 사용하는 것은 건물 디자인의 완성도뿐만 아니라 품질과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제대로 된 디자인을 하는 건축가치고 아무 재료, 아무 제품으로나 시공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 중에는 조금이라도 더 흡족한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 손잡이나 가구는 물론이고 소방 시설까지 주문해서 만드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정도로 건축가의 디자인을 섬세한 부분까지 존중하는 문화와 비교해 볼 때, 설계자가 기성품 중에서 고를 권한조차 없는 한국의 공공건축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다는 것은 애초에 가능한 목표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업체와의 결탁을 막고자 하는 그 소기의 목표라도 달성을 할 수 있다면 모르겠는데, 실제로는 재료와 제품을 선정하는 과정이 음성화되어 발주처와 감독관 등 디자인 비전문가의 손아귀에 그 권한을 쥐어주게 되어 있다. 디자인과 공정함 그 어느 것도 얻지 못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위한 제도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이라도 설계자가 특정 업체를 지정해서는 안 된다는 통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재료와 제품선정 과정의 권한과 책임을 전문가인 설계자에게 투명하게 위임해야 공공건축의 수준이 올라갈 수 있다.

그뿐 아니다. 밤낮없이 매달려가며 설계한 건물에 중국산 아기 장난감을 뻥 튀겨 놓은 것 같은 책 소독기가 놓여 있거나 80년대 스타일의 철제 책장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열이 뻗치는지 모른다. 대체 나라장터에서 파는 물건의 디자인 수준을 높이려는 제도적 노력은 왜 전혀 하지 않는가. 건축가의 디자인 능력을 건물설계에만 쓰도록 되어있는 법은 없다. 가구선정이나 사인 디자인은 사실 건축 디자인의 일부인데도 현재는 설계용역범위에서 빠져 있어 사무직 공무원이 가구를 고르고 사인디자인을 결정하고 있다. 건축가가 하면 같은 비용으로도 지금보다 공공건축 디자인 수준을 훨씬 나아지게 만들 수 있는데도 말이다.

싸게 짓는 것만이 목표인가

설계기간이 짧고 잡무가 많은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설계비도 공사비도 너무 쥐꼬리만 하다. 설계비야 기간이 짧다는 걸 핑계로 적어진 것 같은데, 사실 설계비보다 더 큰 문제는 공사비다. 용도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기는 하나 2018년 기준으로 공공건축의 시공비는 대략 700만 원에서 최고 900만 원대까지 형성되어 있다. 민간 건축의 공사비와 비교하면 일견 충분해 보이는 금액이다. 그러나 실정을 파고들어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공공건축의 공사비라는 것이 낙찰률이 적용될 것을 산정하고 책정한 '설계예가'이기 때문이다. 공공건축에서는 가격경쟁을 통해 업체를 선정하는 입찰과 낙찰과정을 엄격히 거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견적을 내어주는 업체에서는 관공사라고 하면 두 번의 낙찰을 거칠 것을 감안한 가격의 견적서를 준다. 시공사가 낙찰을 받는 과정에서 한번, 그리고 시공사가 각 공정별로 하도급을 주면서 한 번 더 낙찰률을 적용하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건설시장에는 깎일 것을 상정하고 부풀려 놓은 가격인 설계예가와 실제 시장에서 통용되는 가격인 실행가라는 두 가지 가격시스템이 존재한다. 아니, 시공사든 업체든 어차피 받아야 할 돈은 어떻게든 받아내게 되어 있는데, 가격을 깎는 시늉을 하느라고 부풀린 가격을 넣어야 하는 이 복잡한 상황은 대체 뭔가.
사실, 이 모든 시스템의 근저에는 가격을 깎는 과정을 만들어 세금을 절약한 것처럼 보이려는 전시행정과 싸게 하는 것이 곧 성과라는 저급한 평가지표가 깔려있다. 귀중한 세금이니 한 푼이라도 절약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아무리 나라님이라도 시장가를 어길 방도는 없다. 이 눈 가리고 아웅인 이중가격시스템을 적용한 공사예산 때문에 2016년에 우리 사무실에서 설계한 구립도서관은 평당 공사비가 600만원이 넘었는데도 외부에 루버를 붙이고 나니 내부에 석고보드 시공할 돈도 없었다. 평당 공사비가 800만원이 넘는 지금이라고 다르겠는가. 인건비 기준이 오르고 물가가 오르고 에너지 절약을 위해 구비해야하는 설비는 많아졌을 테니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시늉을 위한 시스템과 공사비 부족으로 쩔쩔 매야 할 것인가.

아직도 존재가 목표?

건물이 성립되기 위해서 골조나 토목공사는 줄이려야 줄일 수가 없다. 결국 아낄 수 있는 것은 마감재뿐이다. 세금낭비를 막는답시고 딱 건물이 성립할 수 있는 정도의 금액으로만 예산이 책정되어 있는데다 낙찰제도로 중간에 깎이기까지 해야 하니 품질 좋은 재료를 쓰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벽은 몰탈 바르고 바닥엔 PVC타일 깔아야 맞출 수 있는 공사비를 주면서 지자체장은 명품 건축물을 만들어 달라고 여러 번 강조한다. 동대문에서 옷감 끊을 돈만 주고 아르마니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만일 내게 그런 엄청난 능력이 있었다면 장사를 했지 건축설계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좋다. 목표를 높게 잡을 수는 있다. 그러면 공사비도 명품 흉내라도 낼 수준의 재료를 살 수 있게 올려 달라. 예산이 너무 많아지면 낭비를 하게 되지 않겠냐고? 그건 감시를 잘 하면 된다. 100원짜리를 200원에 사야 낭비지, 200원짜리를 200원에 사는 건 낭비가 아니다. 100원짜리로도 건물을 지을 수 있는데 왜 200원짜리를 사서 짓느냐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대체 어느 천 년에 우리나라에 수준 높은 공공건축이 세워지겠는가? PVC타일과 원목마루가 그 품질이 같은가? 사용자가 느끼는 공간의 품격이나 내구성은 적정한 금액의 투입 없이는 절대로 얻을 수 없다. 내가 공공건축의 공사비를 보면서 느끼는 또 하나의 안타까움이 여기에 있다. 조금만 더 예산이 있으면 사용자가 만지고 느끼고 보는 재료를 좋은 것을 쓸 수가 있는데, 그 마지막에 쓸 돈이 모자란 예산을 책정해서 전체 건물을 싸구려로 만들고 만다. 세금을 가장 가치 있게 쓰는 방법은 저렴한 건축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좋은 성능을 유지하는 가치 있는 건물을 만드는 것이다.

수많은 학자와 건축가들이 공공건축의 공공성과 그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연구기관은 연구를 하고 그에 대한 보고서와 책을 내 왔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 정부가 공공건축의 수준향상을 위해서 얼마의 설계기간과 어떤 범위의 설계도면과 어느 정도의 설계비와 건축비를 사업에 투자해야 할지에 대해서 연구한 적이 있던가? 아직도 우리나라 공공건축은 그저 존재 자체가 목표인가?

나는 우리나라의 공공건축 시스템이 대체 무엇을 목표로 만들어진 것인가 진심 궁금해지곤 한다. 제대로 된 제도란 누가 설계를 하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공공건축 시스템은 건축가에게 그저 최소의 시간과 공사비만 주고 있다. 이런 제도 아래서는 아무리 실력 있는 건축가도 수준 높은 설계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사실, 우리는 이 모든 빨리빨리 시스템과 쥐어짜진 예산의 진짜 이유를 이미 알고 있다. 공공건축 사업이 단기간에 여러 개의 성과를 보는 것이야말로 사업발주권한을 가진 지자체장들과 정치인들의 지상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다른 지자체에서 시행한 비슷한 규모를 가진 사업의 건축설계 용역기간과 예산을 그대로 적용한다. 설계공모 지침서와 과업지시서를 복사하듯이 사업계획도 복사하는 것이다.

제도의 디테일

해마다 공무원들은 엄청난 세금을 써가며 해외 우수 공공건축을 답사한다. 그러나 공무원들의 안목과 공공건축 수준이 직결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꼭 해외에 나가야만 그 안목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해외의 수준 높은 공공건축을 만드는 시스템을 연구하여 그 내용을 우리의 제도에 적용하는 것이야 말로 공공건축의 수준향상에 직접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반갑게도 건축도시공간연구소의 연구 중에서 해외 공공건축제도에 대한 연구를 찾을 수 있었다. '공공건축물의 디자인향상을 위한 디자인품질지표 개발연구'로, 영국의 DQI(Design Quality Indicator)란 제도를 참고한 디자인 지표를 만들어서, 공공건축물의 기획 및 설계단계에서 디자인전문가, 수요기관, 사용자 등 다양한 주체에 의해 여러 단계를 거친 정량적인 디자인 검토를 해서 공공건축물의 수준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상명하달식의 공공건축발주 시스템이 굳어져 있는 우리나라에서 점차 표본으로 삼을 만한 내용이다. 그러나 그 연구결과에서도 하필이면 공공건축의 설계비와 설계기간은 쏙 빠져 있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고 해도 그 제도를 적용하기 위해 필요한 절대적인 요건인 시간과 비용을 들이지 않으면, 그 제도를 적용하는 일은 그야말로 시늉에 그칠 수밖에 없다. 대체 왜 선진국 공공건축의 설계기간과 설계비, 설계 용역의 범위, 디자인 의도 구현을 위한 장치, 공사비, 낙찰제도의 운영과 같은 실질적인 사항에 대해 우리나라 제도와 구체적으로 비교하는 연구를 하지 않는가. 혹시 너무 사소한 디테일의 문제라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나 좋은 건축물이 좋은 디테일 없이 만들어질 수 없듯이, 좋은 공공건축제도는 제도의 디테일을 개선하지 않고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는 영어속담이 있다. 그 말이 여기서도 유효할 듯하다. '공공건축제도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덧붙임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공공건축발주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하고도 정작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다. 바로 실력 있는 설계자를 선정해야할 공모과정이다. 아쉽지만 지면이 부족하니 다른 기회로 미루고 지금은 딱 한마디만 하겠다. 집에 도둑이 들지 않게 하려고 담도 높이 세우고 담장 위에 철조망도 두르고 보안업체의 감지기도 달고서, 도둑이 들어도 잡지 않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공정하게 보이려는 온갖 시늉이 난무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공공건축 공모전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건축가는 없다.


대한건축학회지 <건축> 2019년 2월호에 게재